학원은 억지로 바뀌는... 화산고
2001년 추운 겨울날 한남동 단국대 캠퍼스에서 네스카페 캔커피 광고를 찍었을 때였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목이 쉬도록 레디 액션과 컷을 외친 것은 단지 내가 원하던 색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TV에는 배우 임은경 씨가 출연한 TTL 광고가 신비주의를 내걸고 마구잡이로 흘러나오는 시기여서 나 역시 그 느낌을 살리려 애썼다. 모델로 나선 이들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열심히 쓰러져 몇 번이고 넘어지며 연기를 했지만 내 머릿속은 열악한 현장은 제쳐둔 채 마냥 고집을 부리는 데 바빴다. 그때, 그렇게 멀어져 간 그 색감은 여전히 나의 기억 저편에 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색감이 다시 내게 돌아온 것은 이 영화를 접했을 때였다. 밝고 어둡고, 전혀 어둡지 않은 그 색감, 마치 화면 전체가 물이 빠져 축축한 것처럼 느껴지는 신비롭고 재미있는 그 영화.
2000년대 초, 당시는 청춘 스타들이 우후죽순의 모습을 하나둘 보여 주고 있을 때였다. 배우 장혁은 필자가 졸업한 학교와 경쟁 고교 출신으로 학창시절부터 들었다. 비단 장혁뿐 아니라 권상우 신민아 공효진 허준호 김수로 등 유명 스타들이 총출동했으니 세간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코미디와 액션을 동반한 학원 무협물이라는 설정은 만화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90년대 중반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모았던 이우혁 작가의 소설 '퇴마록'이 박광춘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지만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영화가 순식간에 몰락하면서 팬들의 기대도 식었다. 이후 이와 비슷한 스타일의 영화들이 속속 등장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다. 개인적으로 <화산고등학교>는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김태균 감독은 90년대 후반 모 영화사가 주최한 시나리오 공모전을 통해 작품 한 편을 내놓았다. 초기 원작은 영화와 다른 스타일을 담고 있었지만 나름의 각색을 거쳐 현재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화면으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관객이나 평론으로부터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지적받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학원물이라는 제약 속에서도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부분을 많이 끌어낸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액션에 너무 집중해도, 혹은 인물 간의 관계에 집중해도 어느 쪽이든 단조롭다는 지적을 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 학생과 학생의 관계라는 기본 틀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이야기는 여기에 '사비망록'이라는 비문을 던져놓음으로써 학생들 사이에 큰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사실 화산고 최고의 고수로 불리는 송학림(권상우)도 이 사비만록처럼 이들 사이에서는 한낱 먹잇감에 불과하다.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큰 역할을 하지 못해 겉으로는 외근하게 된 점이 좀 아쉽다. 덕분에 주연을 맡은 김경수(장혁부)는 좀 더 눈에 띄는 환경을 얻게 되고, 다른 학원 무협물들이 그렇듯 진정한 주인공의 등장은 초반에 미미했지만 점차 그 위력을 발휘한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후렴구를 둘러싸고 송학림의 부재를 틈타 1인자가 되기 위한 학생들 사이의 사투라고 할 수 있지만 내용면에서 김경수와 유채이(신민아)와의 관계, 김경수와 수학 선생님(허준호)의 관계, 송학림과 교감 선생님(변희봉)과의 관계 등을 좀 더 다루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인물의 역할만 놓고 보면 장량(김수로)의 무게는 누구 못지않게 큰 인상을 준다. 선과 악, 두 개의 선으로 관객과 충분히 교감하고 또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캐릭터의 색깔은 뒤집어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밉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껴안고 싶을 만큼 독특한 감정을 형성한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면 오히려 주인공 김경수보다 더 뇌리에 박히는 부분이 많다. 수학선생은 학원 5인방을 이끄는 리더로서 누구보다 뛰어난 무공으로 화산고를 빠르게 장악하지만 스토리의 구조상 이들의 몰락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이처럼 영화가 인물 간의 관계를 앞에 두고 너무 솔직한 방향으로만 치닫는 것이 영화의 결점이라면 흠이라고 할 수 있다.
김태균 감독은 풍부한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뼈대를 세우고도 자신이 만든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글의 첫머리에서도 말했듯이, 독특한 색감을 배경으로 한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결국 이 영화는 코미디와 판타지 장르를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무협물을 앞세워 액션에 더 치중하고 있음을 넌지시 내비친다. 당시 제작 여건을 감안할 때 무려 63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것은 우선적으로 화려한 시각 효과와 현란한 무술로 관객의 눈길을 끌겠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엿보인다. 결과적으로 영상미에 치중해 스토리에 대한 손길이 다소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는 게 현실이지만 그런 비판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팬덤을 형성하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관객도 존재한다.영화가 모두 완벽하다는 건 정말 어려워. 스크린을 압도하는 데 동원되는 모든 요소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주어진 예산과 제작 환경 속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게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의 역할이다. 이 영화 <화산고>는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시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던 분야에 새롭고 참신한 도전을 한 영화임이 분명하다. 또한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한국영화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보면 아쉬운 점이 쉽게 눈에 띄지만 큰 부담을 주지 않는 정도로 충분한 무협 액션과 소소한 재미를 전달하기 위해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얘기한 영화의 색깔은 이후에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화면과 분위기를 이끌어내 신선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덕분에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기분이 가시지 않을 만큼 좋다. 현대에 와서는 찾아보기 힘든 신선한 시도와 노력, 그리고 독특한 색깔까지 그 속에서 이 영화의 매력을 다시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